군인 안중근

  107년 전 국제법(만국공법)에 따라 일본군 포로를 놓아준 안중근의사


1907년 광무 황제(고종)가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 등 특사 3인을 보내, 1905년 을사5조약의 무효와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폭로하려 하였다. 그러나 일제와 동맹 관계에 있던 영국의 방해로 실패하자, 일제는 이 사건을 빌미로 광무 황제를 폐하고 순종을 즉위시켰으며, 대한 군대를 강제로 해산하였다.


이 사실을 접한 안중근의사는 “조국의 앞날은 교육에 있다.” 라고 생각하여 가산을 모두 정리해 진남포에 세운 ‘삼흥학교’와 ‘돈의학교’ 운영을 지인들에게 맡기고, 적극적인 의병 활동을 위해 북간도, 연추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른다.


그곳에서 1908년 봄 자산가 최재형의 원조로 이범윤(李範允, 총독), 김두성(金斗星, 의병장 유인석의 변성명, 총대장) 등과 3000~4000명으로 추정되는 대규모 대한국 의군을 창설하여 본격적인 국내 진공 작전을 벌이게 된다. 이때 안 의사는 참모중장(參謀中將) 겸 독립특파대장(獨立特派隊長)으로 항일 무장투쟁을 결행하였다. 특히 그해 7월에는 3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국내 진입 작전을 벌여 두만강 근처 홍의동과 신아산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는데, 이때 안중근의사는 신아산전투에서 생포한 10여 명의 일본인 포로를 동료들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만국공법에 따라 무기까지 돌려주면서 석방시킨다.


또한 안중근의사는 당시 일본군과 맞서 싸우는 자신들의 행동이 비정규전이나 테러 행위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정식으로 편성된 대한 의병이요, 자신 또한 의병 ‘참모중장’의 신분이었던 것이다.


어려서 호연지기를 기르고, 천주교의 박애정신과 경천(敬天) 사상, 공자의 인의(仁義) 사상 등이 몸속에 배어 있는 안중근의사, 서로 불가피하게 적이 되어 죽고 죽이는 전쟁을 치르는 상황에서도 용서를 통해 서로가 화합하고 인류의 공영 발전을 위해 나아가기를 염원했던 그의 바람이 자서전 『안응칠역사』에 생생히 기록되어 있다.


   낮에는 숨고 밤길을 걸어 함경복도에 이르러 일본군과 몇 차례 충돌하여 피차간에 죽고 상하고, 혹은 사로잡힌 자도 있었다. 그 와중에 일본 군인과 장사치들을 사로잡아 묻기를 “그대들은 모두 일본국 신민들이다. 왜 천황의 뜻을 받들지 않고 러일전쟁을 시작할 때 동양 평화와 대한 독립을 보장한다 해놓고는, 오늘에 와서 이렇게 침략하니 이것이 역적 강도짓이 아니고 무엇이냐.” 했더니, 그들이 눈물을 흘리며 대답하기를, “우리들의 본심이 아니요,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나서 살기를 원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것은 사람의 정리인데, 우리들이 만리 바깥 싸움터에서 주인없는 원혼이 되게 되었으니 어찌 통분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이렇게 된 것은 이토 히로부미의 죄입니다. 천황의 뜻을 받들지 않고 제 마음대로 권세를 주물러서 귀중한 생명을 무수히 죽이고, 저는 편안히 누워 복을 누리고 있으므로 우리들이 분개한 마음이 있건마는 어찌할 수 없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훗날 역사적 판단이 어찌 없겠습니까. 우리들은 농사짓고 장사하던 백성일 뿐입니다. 이같이 나라에 폐단이 생기고 백성들이 고달픈데, 평화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일본이 편안하기를 어찌 바랄 수 있겠습니까. 우리들이 비록 죽기는 하나 통탄스럽기 그지없습니다.” 하면서 통곡하기를 그치지 아니했다.


<중략>


그때 우리 군사들이 불평하며 내게 말하기를 "어째서 사로잡은 적을 놓아주는 것이오" 하므로 나는 대답하되, "만국 공법에 사로잡은 적병을 죽이는 법은 전혀 없다. 어디에 가두어 두었다가 뒷날 배상을 받고(협상을 하여) 돌려보내 주는 것이다. 더구나 그들이 말하는 것이 진정에서 나오는 의로운 말이라, 안 놓아주고 어쩌겠는가?" 하고 내가 말하였더니 여러 사람들이 다시 말하기를, "적들은 우리 의병들을 사로잡으면 남김없이 참혹하게도 죽이는 것이요, 또 우리들도 적을 죽일 목적으로 이곳에 와서 풍찬노숙(風餐露宿) 해 가면서, 애써 사로잡은 놈들을 몽땅 놓아 보낸다면 우리들이 무엇을 목적으로 싸우는 것이오." 하므로 나는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다. 적들이 그같이 나쁜 짓을 하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들이 함께 노하는 것인데, 우리들마저 야만된 행동을 하고자 하는가, 또 일본의 4천만 인구를 모두 다 죽인 뒤에 국권을 회복하려는 계획인가.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백번 이기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약하고 저들은 강하니 무조건 싸울 수는 없다. 충성된 행동과 의로운 거사로 이토의 포악한 정략을 공격하여 세계에 널리 알려 열강의 동정을 얻은 다음에야, 한을 풀고 국권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이른바 약한 것으로 강한 것을 물리치고 어진 것으로서 악한 것을 대적한다는 것이다. 그대들은 부디 더 말을 하지 말라" 하고 타일렀으나 대부분 나의 의견에 따르지 않았고 장교들 중에는 부대를 나누어 멀리 가버리는 사람도 있었다.


<안중근 의사 자서전 『안응칠 역사』중에서>


그러나 동료들의 우려대로 그렇게 살려 보낸 일본군 포로들의 누설로 의병 활동 지역이 노출되었고, 일본군의 대대적인 습격에 의해 우리 의병은 대패하였으며 일부 생존자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즉, 국제법에 따라 일본군을 놓아준 결과 석방된 포로들이 가담한 일본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영산전투에서 대패하게 되고, 의병의 세력 역시 크게 잃게 된다. 이 일로 인해 안중근의사는 동포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게 되었고, 차후 재차 의병을 조직하려는 데에도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기서 크게 주목할 것이 있다. 이는 바로 “적국의 포로는 국제법(만국공법)에 따라 처리하는 것이 바른 이치이며, 저들이 진정으로 의로운 말을 하므로 우리가 적들이 하는 것처럼 야만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며 일본군 포로를 석방한 안중근의사의 고매한 인품이다.


이러한 그의 박애정신과 평화사상은 이토히로부미 처단 후의 재판 과정 및 형무소장이 남기고 싶은 말이 있느냐는 질문에 “나는 대한 의병 참모중장 자격으로 적장을 죽인 것일 뿐, 무고한 일본 국민과는 원한이 없다. 한일 양국이 서로 협력하여 평화가 이루어지길 바랄뿐이다. 나는 그것을 위해 기도하겠다.”에 깊이 나타나 있다.


다시 말해 안중근의사는 평화주의와 인도주의 정신에 입각해 일본군 포로를 석방했으며, 우리는 안의사의 이러한 행동을 통해 당시 항일 무장투쟁이 일본의 일부 역사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단순한 비정규전 성격의 투쟁이거나 테러 행위가 아니었음을 여실히 증명해 보일 수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안중근의사가 정식 편성된 대한의군의 참모중장 신분으로 마땅히 지켜야 할 국제법(만국공법)을 준수했음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역사적 자료가 되는 것이다.


또한 안중근의사는 당시의 *만국공법에 대해서도 이미 자세히 알고 있었으며, 자신들의 전투가 단순히 일본군 몇 명을 죽여 적의 전력을 손상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지금은 약한 처지에 있으니 일본의 포악하고 야만적인 침략 행위를 세계에 널리 알려 열강의 동정을 받은 연후 국권을 회복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안중근의사 그는 교육자요, 애국독립운동가요, 그리고 인간에 대한 박애주의자이며, 평화사상가이자 진정한 참 군인으로, 오늘날에도 대한국인의 의연함으로 우리들의 정신을 일깨워 주고 있다.


* 만국공법(미국의 법학자 Henry Wheaton (1785-1848)의 국제법 저서, 총 12장 231절로 구성, 1864년 미국 인권교사 마틴에 의해 중국에서 간행되어 조선 말기 우리나라에 유입된 국제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