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9년(1세) 안중근생가
  • 안중근의사 1879년 9월 2일(음력 7월 16일) 출생
  • 9월 2일(음력 7월 16일) 황해도 해주부 광석동에서 부친 안태훈(진사), 모친 조마리아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남. 아명은 응칠(應七)
1884년(6세)
  • 가족이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이사. 부친 안태훈 진사는 박영효가 주도하던 개화파에서 일본에 파견할 70명의 유학생의 일원으로 선발, 그러나 갑신정변(1884)의 실패로 수구파 정권의 탄압 대상이 되자 고향으로 은거.
  • 서당에 다니며 학문을 익히기 시작했으나 학문보다 사냥에 뜻을 두고 궁술을 익힘.
1885년(7세)
  • 일가 해주에서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이주.
  • 조부 안인수가 설립한 서당에서 한학교육을 받음.
1886년(8세)
  • 동생 정근 출생.
1889년(11세)
  • 동생 공근 출생.
1891년(13세)
  • 여동생 성녀 출생.
1892년(14세)
  • 조부 안인수 별세.
1894년(16세) 김아려규수
  • 황해도 재령군 거주 향반 김홍섭의 딸 김아려(17세) 규수와 결혼.
  • 황해도 지역 동학군에 대항해 부친 안태훈이 조직한 신천의려군 선봉장으로 출전하여 용맹을 떨침.
  • 부친의 초청으로 청계동에 온 백범 김구와 상면함.
1895년(17세)
  • 전 가족이 천주교 신자가 됨(천주교 입교).
1896년(18세)
  • 부친 안태훈, 동학당으로부터 빼앗은 군량미 문제로 천주교 종현(명동)성당으로 피신하였다가 청계동으로 귀향.
1897년(19세)
  • 홍석구 신부(J.Wilhelm, 빌렘)로부터‘도마(Thomas)’로 세례를 받음.
1898년(20세)
  • 청계동 본당에서 안중근은 숙부 안태건회장과 함께 교회 일에 헌신. 안중근은 돈독한 신앙심을 갖고 청계동 성당의 초대 본당신부로 부임한 빌렘 신부를 따라 복사도 하면서 그를 수행하여 황해도의 여러 지방을 다니면서 전교활동에 열중함.
  • 안중근이 서울에 가서 친구들과 더불어 거리를 걸어가다가 한 일본인이 말을 타고 지나가던 한국 사람을 강제로 끌어내리고 말을 탈취하려고 하는 장면을 목격. 이 때 안중근이 그 약탈자의 얼굴을 치면서 권총을 뽑아 그의 배에 갖다 대고 그를 크게 꾸짖어 승복시킴. 말 주인이 말을 도로 찾아서 간 후 그 일본 사람을 놓아주니 많은 사람들이 안중근의 이름을 알고자 함.
1899년(21세)
  • 전 참판 김중환이 옹진 군민의 돈 5천 냥을 갈취한 문제 해결을 위한 총대(總代)로 선출.
  • >뮈텔 주교에게 대학 설립 건의, 받아들여지지 않자 프랑스어 학습 단념.
  • 안중근 만인(萬人契)계 채표회사(彩票會社) 사장 취임.
1902년(24세)
  • 장녀 현생 출생.
1905년(27세)
  •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안중근 부친과 상의하여 독립기지 건설을 위해 중국 산둥반도, 상해를 방문함.
  • 가족은 진남포로 이주하여 만주로 가기로 했으나 귀국하여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세움.
  • 부친 안태훈 사망. 안중근 귀국. 장남 분도 출생, 12세에 사망.
1906년(28세) 안중근28세
  • 안의사 일가 진남포로 이사, 육영사업에 헌신함.
1907년(29세)
  • 서북학회에 가입하고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참가함.
  • 석탄 광산사업을 위한 삼합회(한재호, 송병운과 동업)설립함.
  •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해산을 목격하고 부상자들을 제중원(세브란스 병원)으로 입원시킴.
  • 2남 준생 출생.
  • 망명을 결심하고 부산-원산-청진-회령을 거쳐 두만강을 건너 간도에 김동억과 함께 도착함. 간도 용정을 중심으로 동포들의 상황을 시찰하고 명동촌 선바위 부근에서 사격연습을 함.
  • 종성, 경흥을 거쳐 포시에트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여기서 계동청년회에 가입하고 의병을 모집.
  • 수청에서 안중근, 엄인섭, 김기룡과 결의 형제를 맺음.
1908년(30세)
  • 대한 의군을 조직하고 참모중장직을 맡음.「해조신문」에 「인심결합론」을 발표.
  • 동의회(총장 최재형, 부총장 이범윤, 회장 이위종, 부회장 엄인섭)평의원으로 참가함.
  • 국내 진공작전을 실시하였으나 실패, 의병부대(총독 김두성, 대장 이범윤)중 최재형 부대 우영장으로 참가함. 이강이 설립한 블라디보스토크 공립협회 회원으로 활동함.
1909년(31세)
  • 안의사 단지동맹을 통해 동의단지회를 조직함.
  • 3월 5일경(음력 2월7일경), 안중근은 연추 하리에서 11명의 동지와 함께 모여 왼손 무명지를 끊어 그 피로 ‘대한독립’이라는 네 글자를 쓰고 ‘대한독립만세’를 세 번 외치며 하늘과 땅에 맹세하고 조국의 독립회복과 동양평화유지를 위해 헌신하는 동의단지회를 결성함. 안의사가 회장에 선임, 회무를 주관. 단지혈맹동지 12명 안응칠(31세), 김기룡(30세), 강순기(40세), 정원주(30세), 박봉석(32세), 유치홍(40세) 조응순(25세), 황병길(25세), 백규삼(27세), 김백춘(25세), 김천화(26세), 강창두(27세).
  • 우덕순, 조도선 등과 같이 이토 히로부미 저격을 계획.
  • 3월 21일, ‘해조신문’에 ‘안응칠’이란 이름으로 기서하여 인심을 단합하여 국권을 회복하는 방략에 대하여 논함.
  • 10월 초, 해삼위에서 소문과 신문을 통해 이토가 22일경 하얼빈에 도착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의거를 결심. 안중근은 우덕순과 동행의거를 제의하고, 우덕순도 동의. 안의사 블라디보스톡을 떠나 하얼빈에 도착.
  • 10월 21일, 아침에 안중근, 우덕순은 블라디보스톡을 떠나 하얼빈으로 향하던 중 통역을 맡아줄 유동하와 합류.
  • 22일, 하얼빈에 도착하여 김성백의 집에서 유숙하고 다음날 조도선을 찾아가서 함께 의거를 도모할 것을 동의받음. 대동공보사 주필 이강에게 의거 결행과 자금에 관한 편지를 쓰고 의거의 결의를 읊은 ‘장부가’를 짓고, 우덕순도 이에 화답하는 ‘거의가’를 짓다.
  • 10월 26일, 안중근, 7시경 하얼빈 역 도착. 이토 일행, 9시 15분에 열차에서 하차. 9시 30분 안중근, 러시아 의장대 사열 후 일본 환영단으로 향하던 이토에게 3발을 발사하여 부상을 입힘. 이때 러시아 군인이 덮치자 권총을 떨어뜨리고 “코레아 우라”를 세번 외침. 이토를 비롯한 가와카미 총영사, 모리 비서관, 다나카 만철 이사 등을 살상. 이토, 10시에 절명함. 안중근, 하얼빈 역 구내에서 러시아 관헌으로부터 조사받음. 러시아 당국, 11시 35분에 안중근을 일제에 인도하기로 결정함. 11시55분 채가구에 있던 우덕순, 조도선 체포당함.
  • 10월 27일, 일본 외상 고무라 주타로, 안중근 재판을 관동도독부로 넘김. 「대한매일신보」, 안중근 의거를 국내에 소개함. 안의사 일제관헌으로부터 본격적인 심문을 받기 시작.
  • 10월 30일경, 하얼빈 일본 총영사관에서 구연효웅 검찰관의 심문을 받기 시작.
  • 일본정부 관동도독부 법원에 안의사 ‘사형’을 지령.
  • 12월 2일, 소촌수태랑 외무대신이 현지 파견중인 창지철길 정무국장을 통하여 ‘중형징죄’를 전보로 명령 전달하게 하고 나아가 고등법원장 평석씨인을 본국으로 소환해 ‘사형판결’을 위한 공판개정을 다짐받음.
  • 12월 13일, 안중근, 「안응칠 역사」기술 시작.
1910년(32세)
  • 안의사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공판 개시.
  • 1월 31일 ~ 2월 1일경부터, 일본의 검찰관과 옥리들의 심문태도가 강압적으로 돌변하고 안중근에게 공판개정일이 6~7일 뒤로 결정되었다고 통보함. 또한 이미 허가한 한국인 변호사의 변호는 물론 영국, 러시아, 스페인 등의 외국변호사도 일체 변호가 허가되지 않으며, 일본인 관선 변호사만이 허용된다는 사실을 통보.
  • 1910년 2월 7일 오전 10시, 중국 여순 관동도독부 고등법원 제1호 법정에서 재판장 진과십장의 단독심리하에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등 하얼빈 의거 관련자 4인에 대한 제 1회 공판이 열림. 재판부는 재판장에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장 진과십장, 담당검찰관은 구연효웅, 관선변호사는 수야길태랑, 겸전정치, 서기 도변랑일로 전원 일본인 일색으로 구성. 안중근은 “3년 전부터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이등을 포살코자 했으며, 이 의거는 개인적인 원한이 아니라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서 독립전쟁의 일환으로 결행한 것이다”라고 진술.
  • 2월 9일 오전 9시 50분, 제 3회 공판에서 안중근은 이토의 죄악 15개조를 설명하다 중도에 재판장에 의하여 중지 당함.
  • 2월 10일 오전 9시 40분, 제 4회 공판에서 안중근에게 사형이 선고됨. 우덕순에게 징역 3년, 조도선과 유동하에게 징역 1년6월이 구형됨.
  • 안중근은 지난 1909년 12월 13일부터 집필하기 시작한 그의 자서전 ‘안응칠역사’를 92일만에 탈고하고, ‘동양평화론’을 쓰기 시작함. 한편 이 무렵부터 안중근은‘국가안위노심초사’, ‘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등 한문 붓글씨로 된 많은 유작을 남김. 안중근이 갇혀있는 감옥소에 관계하던 많은 일본인들이 비단과 지필묵을 가지고 와서 안의사에게 기념소장할 붓글씨를 써줄 것을 부탁함. 앞서 안병찬 변호사를 통하여 뼈에 사무치는 동포에게 고하는 유언을 전달.
  • 1910년 3월 26일, 안중근은 전날 어머님께서 손수 지어보내주신 수의로 갈아입고 형장으로 나아가기 전에 약 10분간 무릎을 꿇고 기도. 임형직전 마지막으로 남길 유언을 묻는 검찰관의 물음에, “나의 의거는 동양평화를 위해 결행한 것 이므로 임형관리들도 앞으로 한일간에 화합하여 동양평화에 이바지하기 바란다.”고 하고 이 자리에서 함께 ‘동양평화만세’를 부를 것을 제기하자 이를 제지하고 교수형을 집행, 안의사 의연하게 순국.